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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대 한중관계브리핑 (프레시안)

[2021.07.31] 만연한 ‘혐중’ 정서, ‘만보산 사건’을 되돌아보며
[2021.07.31] 만연한 ‘혐중’ 정서, ‘만보산 사건’을 되돌아보며
한중관계연구원2021-07-31

만보산 사건 90주년 : 제국주의 일본은 한중 민족 갈등을 이용했다

김주용 |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교수

 

만보산 사건이란

 

올해는 만보산 사건 90주년이 되는 해이다. 민족 간의 갈등과 대결을 타민족이 교묘히 이용한 사건이 바로 만보산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1931년 7월 중국 길림성 창춘(長春) 외곽의 한 농촌에서 농수로 문제로 이주 한인과 중국인 간에 일촉즉발의 대결이 벌어졌다. 이른바 만보산(萬寶山) 사건이었다.

 

제국주의 일본의 한반도 강점은 만주지역으로 농민들의 ‘송출’을 촉진하는 촉매제였다. 1910년대부터 꾸준히 증가한 만주로의 한인 이주 물결은 현지 중국 농민과의 마찰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러한 분쟁의 싹을 제거하기 위해 민족운동가들은 북간도 지역 ‘간민회’와 서간도 지역 ‘한족회’ 등을 설립하여 이주 한인들의 정착과 보호에 힘썼다.

 

하지만 자치 단체를 설립하고 운영한다고 해서 만주 모든 지역에서 이주 한인들이 보호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각종 변수가 많았다. 중국 지방정부와 중국인 지주의 태도, 제국주의 일본의 기관 입장에 따라 한인들의 처지는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만보산 사건은 자체로서의 중요성도 있지만 제국주의 일본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세 틀을 마련하는 데 이용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되었다. 국내에서 벌어진 배화(排華)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만보산 사건은 중국인과 이주 한인 간 갈등과 충돌 양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혐오와 차별을 만보산 사건에 적용시킨 제국주의 일본은 대륙침략의 ‘소모품’으로 이주 한인을 활용하였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한중 양국이 공동 반제국주의 전선을 형성해야 한다고 천명했다.

 

만보산 사건은 어떻게 일어났는가

 

만보산은 길림성 장춘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 지역은 수전농업에 최적화된 곳이지만 대규모 농사를 위해서는 관개수로 구축이 선행되어야 했다. 1931년 4월 창춘 도전공사(稻田公司)의 경리 하오용더(郝永德)가 이통하(伊通河) 기슭에 있는 만보산 지역의 미개간지 약 3 헥타아르를 조차하였으며, 다시 이주 한인 이승훈(李昇薰) 등 8인과 10년 기한으로 조차 계약을 했다.

 

당시 한인 농민 180 명을 동원하여 수로 공사를 진행하자 부근 토착 중국 농민들은 다소 피해를 입게 되었다. 이통하에서 물을 끌어오면서 중국인 소유의 토지를 경유하게 되었고, 하오용더가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한다는 명목으로 중국인 지주에게 지불할 토지승락 대금을 중간에서 착복하였다. 그 과정에서 중국인 지주들이 길림성 정부에 정식 고발장을 제출하였으며, 이로 인해 하오용더는 체포되었고, 관개수로 공사는 교착상태에 빠졌다.

 

중국 측은 5월 31일 2백 명의 보안대를 파견하여 공사 중지를 권고하다가 한인 9명을 체포하였다. 이에 대해서 일본의 다시로(田代) 영사는 체포한 농민을 즉시 석방할 것을 요구하고, 동시에 6월 2일 영사관 경찰관을 파견해 그 보호 밑에서 공사를 강행케 하였다. 이 조치는 중국 측을 자극해서 중·일 쌍방의 무장 경관이 대치하는 상태까지 되었다가 6월 8일 임시 협정으로 쌍방의 경관이 물러나고 공동 조사가 진행되었다.

 

6월 12일 일본 측은 협정을 어기고 다시 경관을 파견해 그 보호 밑에서 공사를 속행하여 6월 하순에는 이통하 제방 공사에 착수하였다. 이것을 본 만보산 일대의 중국 농민 약 500 명은 7월 1일 농기구를 가지고 모여들어 용수로를 막은 제방을 파괴하였다. 그 다음날 다시 모인 중국인 농민과 중국 경관 3백 명이 동원되었는데 한인 농민은 일본의 영사경찰력을 포함한 무력만 믿고 수로 복구와 제방 공사를 계속 진행시켜 7월 11일에는 물길이 통하게 되었다.

 

제국주의 일본 영사관의 행위가 과연 한국 농민을 보호하려는 것인지 재삼 논할 필요는 없다. 다만 한중 농민 간 충돌을 침소봉대하여 악의적인 ‘가짜뉴스’를 전달하여 <조선일보>를 통해 대대적으로 국내에 유포한 사실은 향후 만주지역뿐만 아니라 관내 독립운동 세력에게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러한 언론 보도로 국내에서 반(反)중국적 감정을 유발시켜 인천·평양·서울 등지에서 수천 명의 한국인이 중국인의 상점을 습격하고 100여 명의 중국인을 학살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 1931년 만보산 사건으로 파괴된 중국인 거리의 모습

 

만보산 사건에 대한 한국 독립운동계의 대응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1931년 7월에 발생한 만보산 사건을 심각하게 인식하였다. 임시정부 내무부 위원들은 만보산 사건과 중국인 배척운동에 대응하기 위해 매일 임시정부 청사에서 회합하였으며, 정리된 의견은 당시 상하이에서 활동했던 언론인 신언준을 통해 국내 언론에 보도되었다.

 

신언준은 이미 상해에서 동아일보 지국장 및 흥사단 원동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재만 한인들의 토지소유권 문제에도 크게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는 만보산 사건에 대해 장학량에게 서한을 보냈으며, 국민정부 외교부장과의 특별회담도 가졌다. 주요 내용은 양 민족의 오해를 풀고 우호 친선관계를 유지하자는 것이었다.

 

7월 8일 임시정부는 남경정부와 협의한 후 외무대신 조소앙 명의의 성명서를 발표하였으며, 주요 골자는 다음과 같다. 먼저 조소앙은 근래 한국 내에서 발생한 ‘화교 사건’으로 무고한 중국인들이 많이 다치거나 죽게 된 원인과 인과관계를 중국 국민정부와 정밀히 조사하여 향후 이와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화교 사건’에 대한 원인을 일본 제국주의에 있다고 보았다. 만보산 사건, 즉 수로문제의 촉발은 제국주의 일본이 한국인의 독립운동과 중국 국민의 혁명 능력이 연결되는 것을 차단하는 촉매제라고 분석하였다. 그리고 중국과는 다시없는 벗이며, 임시정부는 이러한 사건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중국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

 

첫째 중국 국민정부와 민중전체가 하나 되어 힘써 분발해서 일본인을 제압하며 한국과 중국의 자주독립을 힘써 도모하기를 바랍니다. 둘째 중국 국민정부와 동삼성의 관리, 인민들이 한국 교민에 대해 추방을 완화하고 함께 적을 제압할 것을 속히 도모하기를 바랍니다. 셋째 중국 언론계가 공평한 태도를 견지하여 한국과 중국 민족이 오해를 종식하고 공동의 적개심을 일으킬 수 있게 하기를 바랍니다. 동아시아의 원흉을 신속히 타도합시다(조소앙 지음, 김보성, 임영길 옮김, <소앙집>, 한국고전번역원, 2019, 212쪽~213쪽).

 

7월 9일 도산 안창호를 주축으로 임시정부는 상하이 한인사회에서 만보산 사건으로 인한 국내 반중국인 폭동이 고의적으로 일본이 사주했으며, 한국인들이 자신의 자유의지가 아님을 중국 여론에 호소하기 위해 한인조직 연합회를 결성할 정도로 기민하게 움직였다. 이 때 참여한 주된 인물로는 조소앙, 이동녕, 김구, 박창세, 구익균, 김덕군, 강영파, 오의순, 안창호였다.

 

또한 조선의용대는 만보산 사건이 일어난 후 지속적으로 이 사건의 배후에 제국주의 일본이 있음을 강조했다. 이 의견을 실어준 <구망일보>는 궈모뤄(郭沫若)가 상해에서 발행한 신문이었다. 이는 1937년 중일전쟁 이후 한국과의 공동항일투쟁이 필요했던 상황이 투영된 것이었다.

 

동북아시아에서 신() 만보산 사건은 또 일어날까

 

임시정부의 인식과 대응은 무엇보다도 일본제국주의의 대륙 침략에 만주지역 이주 한인들이 이용되고 있었음을 선전하는데 집중되었다. 특히 만보산 사건 자체를 중국 국민정부에서 방관할 경우 만주는 일본의 차지가 될 수 있음을 알렸다. 만주의 이주 한인이 중국 지방관헌과 현지 한족들의 차별을 감내하고 정착하였음을 국민정부에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만보산 사건의 근본 문제이자 이주한인들의 생존권 문제였던 상조권(소유권이 아닌 장기계약권)에 대한 중국 정부의 근본 대책을 호소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대응은 1931년 9월 18일 관동군이 심양의 북대영을 공격한 이른바 만주사변으로 어렵게 되었다. 오히려 만주사변(9.18)을 계기로 한중 양국의 공동투쟁만이 고조되는 형국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해 성립된 만주국은 오족협화(五族協和)를 강조하면서 민족 간의 갈등을 봉합하려 했다.

 

오늘날 한국 서울의 대림동을 중심으로 형성된 중국인(조선족 포함) 정착지에서 또 다른 민족 간의 갈등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예컨대 중국 대륙에서 한족과 조선족은 중국 공민으로 살아왔다. 분명 조선족은 중국 소수민족의 일원으로 공민권의 지위를 부여받았으며, 한국의 재외동포의 일원으로 살아가기도 했다.

 

다만 한족의 입장에서 같은 중국인이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한국에서 조선족은 ‘언어의 소통’이라는 강점을 통해 한국 노동시장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21세기 민족 간의 사소한(?)의 갈등의 실체를 우려하는 것이 지나친 기우는 아닐 것이다.

 

인간사회의 갈등과 대결, 우위의 독점과 배타의 근본적 원인은 무엇일까.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인간 고유의 독자성일까. 쉽지 않은 답이다. 오늘도 세상에는 ‘나만’ 또는 ‘내 것’의 중요함과 독특함을 강조하는 현상이 일상화 되어 있다. 심지어 음식을 먹을 때 자신만의 스타일을 세상에 강요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보듬을 자세는 아직까지도 요원한 것일까.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73020131219418#0DKU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