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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대 한중관계브리핑 (프레시안)

[2021.10.08] ‘다르게 적힌’ 침략의 기억과 저항의 기억
[2021.10.08] ‘다르게 적힌’ 침략의 기억과 저항의 기억
한중관계연구원2021-10-08

만주사변, 전쟁과 기억의 현장

김주용 |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교수

 

만주사변이란

 

중국은 선양(瀋陽)에 9.18역사박물관을 1987년에 건립하였다. 우리에게는 ‘만주사변’으로 익숙한 그날의 참상을 잊지 않기 위해 건축물을 세운 것이다.

 

만주사변 다음해 만주국을 설립한 제국주의 일본은 한인(韓人)들을 한반도에서 이주시켰다. 그에 앞장선 인물은 일본육군사관학교 제27기생이었던 윤상필 대위였다.

 

뿐만 아니라 한인(韓人) 청년들을 전쟁의 최전선에 투입하기도 했다. 간도특설대가 대표적이다. 그래서 만주국은 한국근현대사에서 공간적으로 아주 중요한 곳이기도 하다.

 

1931년 9월 18일부터 1932년 2월 5일까지 일본군은 주력 관동군, 제2사단 등을 출동시켜 선양을 중심으로 장춘과 하얼빈, 치치하얼까지 점령했다.

 

선양을 점령하면서 병기 공장에 ‘일본군 외에 출입을 금지하며 출입자는 사살한다’ 라고 건물벽에 크게 써놓았다. 중국인들에게 공포심과 함께 일본군이 만주지역을 완전히 점령하였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만주사변 당시 북대영 대장을 맡고 있었던 리수꾸이(李樹桂)는 일본군의 침입 상황과 중국군의 퇴각 상황을 “18일 10시 20분 유조호 방면에서 큰 굉음이 발생하였으며 일본군이 바로 북대영을 침습하자 이에 북대영은 저항 한번 제대로 못하고 동대영으로 퇴각하였고 이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라고 기록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일본군은 9월 19일 요녕성 정부를 점령했으며, 여순에 있는 관동군 사령부를 선양으로 이전했다. 9월 20일 관동군 사령관을 시장으로 선임하였으며, 선양을 봉천으로 개명하였다.

 

이후 1932년 2월 5일 하얼빈을 점령함으로써 동북지역의 대도시는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만주지역 대도시 점령이 일단락되면서 일제는 1932년 3월 1일 만주국 성립을 공포하였다.

 

평정산 학살의 기억과 기념

 

만주지역은 일제가 한국독립운동의 책원지라고 할 만큼 항일무장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된 곳이다. 일제의 만주침략은 동아시아에서 경계의 끈을 놓지 않았던 열강들의 의혹을 사기에 충분했다.

 

당시 국제연맹은 리튼을 조사단장으로 한 만주 침략에 대한 실사를 실시했다. 국제사회의 움직임은 만주국의 독립성을 담보로 할 때 완화될 수 있었다. 그 상징적 존재가 바로 만주국군의 창설이었다.

 

만주국군은 초기 혼성여단, 보병단, 보병영으로 구성됐다. 군정부에서는 만주국군 정비를 위해 국군정비 방침을 3기로 나누어 설정했다. 제1기는 사병의 동요를 방지하고 국군의 안정을 도모하며 2기는 비적 토벌을 할 수 있는 군대로 만들고 3기는 확실한 국군으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정책 하에 만주국군은 대내외적 존재를 과시하였다. 또한 관동군은 반만항일(反滿抗日)세력을 진압하는데 전력을 쏟아야 했지만 관동군의 기본 임무는 대소전(對蘇戰) 준비였다.

 

1933년 일본 육군성은 대소전 준비를 구체화했고, 같은 해 만주관동군도 소련이 수세적 상황에 놓였기 때문에 만몽(滿蒙)경략에 경주하여 소련의 적화정책을 무력화시키고 기회가 되면 ‘길항적인 세력’을 일소해야 한다는 방침으로 정리했다.

 

만주국측은 과거 군벌체제와 잔존하던 저항세력을 비적이라 칭했다. 그러나 관동군이 창설한 만주국군의 근간이 바로 이러한 비적출신 군벌장군들과 그 휘하의 군인이었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이른바 ‘비적’ 진압을 위해 일본은 여러 종류의 인력을 동원했는데, 한때 10만 명을 상회한 만주국군을 포함, 진압에 동원된 병력의 기강을 잡는 것은 쉽지 않은 국가적 사업이었다.

 

만주국군은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시 되었다. 하나는 국가적 신인도이며 다른 하나는 군대 본연의 임무이다. 후자의 경우 만주국 초기에는 ‘치안유지’를 위해 경찰과 함께 동원되었다.

 

만주국 건국 이후 끊임없이 전개된 저항세력의 활동은 군대의 임무를 잠시 내적 문제의 ‘해결’에 치중하게 만들었다. 기존 군벌들의 저항도 있었지만, 항일무장세력의 저항은 만주국 정부의 존립자체를 위협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기 때문에 군대를 통한 탄압을 펼치게 된 것이다. 평정산 사건은 만주국의 반인류적 행위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1932년 9월 15일 야간에 요녕민중항일자위군(辽宁民众抗日自卫军) 1200여 명이 평정산 근처의 일본군을 습격하여 파출소 등을 파괴하였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다음날 오전 일본헌병대 푸순(撫順)분견대장 나가와(长川上精)가 이끄는 일본군은 평정산 지역에 거주하는 촌민들을 집합한 뒤 총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항일 무장투쟁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노인·부녀자·어린이를 포함한 3000여 명을 무참히 학살하였으며, 다시 시신을 불태웠다. 평정산 학살은 일본군이 중국인들을 대규모 학살한 첫 사례이다. 당시 모인 3000여 명 가운데 생존한 사람은 100여 명에 불과하였다.

 

1951년 3월, ‘평정산 학살’로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푸순시(撫順市)에서는 학살지에 ‘평정산순난동포기념비(平頂山殉難同胞紀念碑)’를 건립하고, 1971년 ‘평정산순난동포유골관(平頂山殉難同胞遺骨觀)’을 건립했다. 기념관 내에는 현장에서 발굴된 유해를 수습하여 전시하였다. 1988년 1월 31일 국무원에서는 평정산참안유적(平頂山慘案遺蹟)을 전국 중요 문화재로 지정하였다.

 

기념관에 전시된 800여 구의 유해는 1970년 학살현장에서 발굴해 전시한 것이다. 사망한 사람 중에 남녀노소의 시체가 종횡으로 겹쳐져, 남북 길이 약 80미터, 동서 너비 약 6미터 범위 안에 분포하였다. 학살의 기억을 재생산하기 위해 기념관 입구에 거대한 글자로 희생당한 중국인 숫자인 3000을 양각한 기념비를 설치하였다.

▲ 평정산 기념관 전경(위) 및 평정산 기념관 기념물(아래) ⓒ김주용

 

선양 연합군 포로수용소

 

만주사변과 만주국을 건립한 제국주의 일본은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일으킨다. 이후 전선은 아시아 전역으로 확대됐으며, 이로써 동북아시아가 제2차 세계대전의 한복판에 놓이게 됐다.

▲ 포로수용소 굴뚝 ⓒ김주용

 

중국 선양에는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제국주의 일본이 설치한 연합군 포로 수용소가 남아 있다. 1942년부터 1945년 8월까지 포로수용소의 센터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선양에 본소를 설립하였으며, 쌍랴오(雙遼)와 랴오위엔(遼源) 두 곳에 지소를 설립했다.

 

연합군 포로는 미국·영국·호주·네덜란드·프랑스·캐나다 등 6개국의 군인들이었으며, 포로 수는 2000여 명이었다. 태평양 전역의 연합군 포로들이었다.

 

연합군 포로들은 1942년 10월 7일 마닐라에서 10월 11일 대만 高雄을 거쳐 11월 7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부산항에서 신체검사 및 소독을 통한 후 11월 11일 ‘봉천포로수용소’에 수용됐다.

 

일제는 1943년 포로들을 효율적으로 관리·감독·활용하기 위하여 만주공작기계주식회사 동쪽에 새로운 포로수용소를 건립을 계획했다. 같은 해 7월 29일 펑티엔시 대동구에 선양2전맹군전부영(沈陽二戰盟軍戰俘營)이 건립됐다.

 

포로수용소의 면적은 5만 제곱미터(㎡)였으며, 시멘트와 자갈의 혼합형태의 건축물이었다. 포로수용소 동북쪽에는 일본군이 거주하였으며, 포로들을 감시할 수 있는 체제를 완비했다.

 

1942년에 전체 포로의 수는 1341명이었으며, 다음해에는 1271명으로 약간 감소하였다. 이는 가혹한 노동과 탄압으로 인한 사망자가 많이 발생하였음을 의미한다.

 

1944년과 1945년에는 숫자가 계속 증가하였으며, 국적으로는 1942년에는 미국과 영국군만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지만, 1943년부터는 호주·캐나다·네덜란드 군인들도 수용되었다. 숫적으로는 미국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주로 포로수용소 1호와 부속건물이 있다. 일본군 포로 수용소·병원·구치소와 보일러실 굴뚝 등이 급수탑이다. 선양시는 옛터에 진열관과 ‘사난자(死難者) 비석 벽’을 새로 만들었다. 비벽에는 전쟁 포로수용소에서 숨진 연합군 병사 200여 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 전시관 입구(왼쪽) 및 포로수용소 전경(오른쪽) ⓒ김주용

 

전쟁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이유

 

만주사변(9.18)은 새로운 동북아 국제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일본제국주의의 야심찬 첫발이었다. 중국은 공식적으로 항일전쟁의 출발을 만주사변으로 잡고 있다. 침략의 기억과 저항의 기억은 상반된다.

 

특히 일본의 경우 침략의 기억을 애써 외면할 때가 많다. 가해자로서 일본은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반성 보다는 자국민들에게 원폭의 피해를 강조하면서 그것을 평화로 포장할 때가 많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훼손하고 제국주의 산물이 시대적으로 어쩔 수 없는 역사적 결과라고 주장하는 일본 우익은 지금도 이 문제에 대해 ‘직시’하고 있지 않는다.

 

전쟁은 흔히 승자의 영광과 패자의 치욕으로 종식되지만, 패자의 치욕은 복수심을 불태우게 하여 새로운 시대에 또 다른 승자의 영광을 꿈꾸게 한다. 그것이 바로 전쟁의 무한 반복이다. 전쟁을 극복하고 책임지는 자세는 국제사회의 모본이다. 하지만 힘이 없으면 이것 역시 공허할 뿐이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100717140250908#0DK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