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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대 한중관계브리핑 (프레시안)

[2022.06.03]조선족, 정체성 옅어지며 중국에 흡수되나
[2022.06.03]조선족, 정체성 옅어지며 중국에 흡수되나
한중관계연구원2022-06-03
[원광대 ‘한중관계 브리핑’] 중국 조선족의 조선어문 교과서에서 김학철 찾기

 

 

중국 조선족의 조선어문 교과서, 디아스포라 김학철

 

김학철은 1916년 11월 4일 조선의 아름다운 항구도시 원산에서 태여났는데 1935년 서울 보성고등학교를 다닐 때 반일사상에 눈뜨게 된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하는 리상화의 부르짖음을 듣고는 일제의 통치하에 망국노로 사는 운명이 한스러웠고 입쎈의 <민중의 적>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것은 혼자 따로 사는 사람”이라는 웨침을 듣고는 그대로 주저앉아있을수 없었다.

 

그는 빼앗긴 조국을 찾겠다는 일념을 안고 상해에 가서 김원봉이 지도하는 반일테로조직인 민족혁명당에 가입하였다. 그후 조직의 지령에 따라 중앙륙군군관학교에 들어간 그는 거기서 맑스주의와 접촉하게 되였고 단순한 민족주의자로부터 맑스주의자로 변신하였다. 그후 그는 조선의용군에서 분대장으로 있을 때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위 글은 조선어문 교과서에 수록된 <불굴의 투혼-김학철 선생>의 일부이다. 조선어문은 중국 조선족이 조선어를 배울 때 사용하는 교과서인데, 이 교과서에서는 조선족 위인으로 김학철의 전기문이 수록돼 있다.

 

이 전기문에는 김학철이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나 학창 시절 반일 사상에 눈을 떠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던 중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공산주의자로 살았던 삶의 궤적이 잘 나타나 있다.

 

인용하지 않은 전기문의 다른 부분에서는 좌경노선이 강화되던 문화대혁명 시기에 김학철이 모택동 우상주의에 대해 비판하는 소설 <20세기의 신화>를 창작해서 반혁명분자로 몰렸고 이로 인해 옥고를 치러야 했던 필화 사건도 간접적으로나마 서술돼 있다.

 

조선어문 교과서가 연변교육출판사에서 제작‧출판한 중국의 국정교과서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김학철 전기문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빼앗긴 조국을 찾겠다는 일념’이다. 이 표현은 조선족이 중국 국적을 가지고 있지만 한반도에 고국을 갖고 있었음을 명시하고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민족국가의 영토를 벗어나 이주국에서 거주하는 이들을 디아스포라(diaspora)라고 일컫는다. 김학철의 삶은 식민주의로 인해 한반도 고국을 떠나 중국 동북 지역에 정착하며 생존했던 디아스포라로서의 조선족의 삶과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조선어문 교과서에 수록된 김학철의 전기문을 읽으며 조선족 학생들은 자신들의 뿌리, 민족 정체성을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 연변교육출판사에서 펴낸 <조선어문>(왼쪽)과 김학철 평전(오른쪽) .

 

2021년 심사통과 조선어문 교과서에서 사라진 김학철 전기문

 

중국 조선족의 조선어문 교과서는 중학교 교육과정에 해당하는 ‘의무교육조선족학교 조선어문과정표준'(2004년)과 고등학교 교육과정에 해당하는 ‘조선족고급중학교 조선어문과정표준'(2007년)이 제정된 이후 기본 골조는 유지한 채로 교과서 단원 구성과 작품을 수시로 교체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런데 현재 사용되고 있는 2021년 심사통과 조선어문 교과서에서 심상치 않은 변화가 감지된다. 이전까지 수록되어 있던 <불굴의 투혼-김학철 선생> 전기문이 수록되지 않은 것이 단적인 예이다.

 

조선족 항일역사의 증인으로서의 김학철

 

작품 하나가 사라진 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이는 김학철의 삶이 보여주었던 중국 거주 조선인의 항일역사가 축소되는 단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문제적이다.

 

항일투쟁의 역사는 동북지역에 거주하던 조선인이 중국의 조선족으로 편입되기 이전의 역사이며, 편입 이후에도 조선족으로의 자부심과 민족 정체성의 근간이 되었다. 조선족은 중국 내 다른 소수민족과 달리 월경(越境)을 통해 중국 내로 유입된 유일한 민족으로, 중국 동북지역을 중심으로 일제에 대항한 항일전쟁에 참여함으로써 신중국 건립에 주요한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조선족이 항일역사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뿌리와 함께 이주의 역사를 설명해야 하기에 항일역사는 조선족의 민족정체성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기호라고 볼 수 있다.

 

조선어문 교과서에 나타난 조선인의 항일전쟁

 

2004-2007년에 출판된 조선어문 교과서와 최근의 교과서를 비교하면 항일전쟁을 다루는 방식의 더욱 확실한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2004-2007년 조선어문 교과서에서 중국에서 조선인이 참여했던 항일전쟁의 목적은 ‘한반도 조국의 독립’과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피압박민족, 세계 인민의 해방을 위한 연대, 즉 ‘국제주의적 항전’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지녔다.

 

그렇지만 이 두 가지 가운데서도 한반도 조국의 독립을 위한 투쟁이라는 의미가 전면에 드러났다. 그래서 2005년에 출판된 조선어문 교과서에는 만주에서 항일무장운동을 했던 김일성의 보천보전투를 소재로 북한 작가 조기천이 쓴 장편서사시 <백두산> 가운데 ‘조선독립 만세’을 외치며 전사하는 영남이의 서사가 일부 수록돼 있다.

 

반면 최근에 사용되는 조선어문 교과서에는 항일전쟁이 한반도 조국의 독립을 위한 투쟁이었음을 연상시킬 수 있는 텍스트들이 모두 교체되었다. 자연히 국제주의적 항전의 의미가 강화되었고, 더불어서 항일전쟁이 중국의 국토를 보위하기 위한 애국주의 전쟁이었음이 새롭게 강조되었다.

 

그래서 2021년에 출판된 조선어문교과서에 수록된 <목단강에 몸을 던진 여덟 녀용사>라는 글에서 동북항일연군으로 등장한 여덟명의 여자 용사들은 일제에 대항해 싸우다가 전사하는 순간에 “제국주의를 타도하자!”를 외치며, <국제가>를 합창한다.

 

이 여덟 용사 가운데는 두 명의 조선인(안순복과 리봉선)이 포함돼 있었지만, 교과서에는 여덟 용사의 민족명이 노출돼 있지 않다. 조선족 학생들이 이러한 글들을 읽으며 중국에서 조선인이 참여한 항일전쟁이 한반도 고국의 독립을 위한 전쟁이기도 했으며, 이 전쟁이 조선 민족의 역사이기도 하다는 점을 떠올리게 될지는 미지수다.

 

중국 조선족의 조선어문 교과서와 김학철

 

최신판 조선어문 교과서에는 김학철의 전기문 대신 <초심을 홰불처럼 추켜든 사람-영웅 장부청의 이야기>가 수록돼 있다. 중국 해방전쟁의 전투 영웅으로 유명한 장부청의 일생을 담고 있는 전기문이다.

 

김학철 대신 장부청으로 바뀐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조선족이 디아스포라로서 조선족이 갖는 고유한 민족 정체성을 상실한 채 중국의 국민 정체성에 귀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조선족 작가로 유명한 금희의 <세상에 없는 나의 집>에서 주인공인 ‘나’는 조선족으로의 정체성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즉, ‘나’는 한국인과는 “도무지 같은 시각으로 함께 현실을 해석할 수 없”고, 중국 한족과는 시대와 배경을 공유할 수 있었지만 “개인적인 습관과 취향”은 공유할 수 없는 조선족만의 정체성을 지닌 것이다.

 

중국 조선족이 자신들의 민족 정체성을 잃고 동화되지 않기 위해 디아스포라로서 정체성을 잊지 않는 것은 중요한 일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최근 조선어문 교과서에서 김학철이 전기문이 사라진 것은 우려스럽지만, 위축과 회복을 반복했던 조선족 민족교육의 역사를 떠올린다면 변화에 대한 기대를 품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