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다 아시아 (원대신문)
| [2026.06.01] 동북아시아, 에너지를 다시 꿈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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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중관계연구원2026-06-16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이메일 프린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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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01] 동북아시아, 에너지를 다시 꿈꾸다 허남진
우리는 에너지를 너무 오랫동안 ‘성장’의 언어로만 이해해왔다.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빠르게 개발하고, 더 크게 축적하는 힘이 곧 에너지라고 믿어왔다. 개인의 삶에서도, 국가의 발전에서도, 대학의 경쟁에서도 에너지는 늘 성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투입되는 자원이었다.
그러나 지금 동북아시아는 이러한 에너지 이해가 한계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한국, 중국, 일본을 비롯한 동북아시아 사회는 서로 다른 역사와 체제를 지니고 있지만, 압축적 근대화와 발전주의의 경험을 공유한다. 전후 복구, 산업화, 도시화, 교육 경쟁, 장시간 노동, 기술 혁신은 이 지역을 세계경제의 핵심 축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 과정은 동시에 인간과 자연을 끊임없이 소진시키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렇게 형성된 동북아시아의 근대는 ‘에너지 문명’이었다. 석탄, 석유, 원자력, 전기만이 에너지가 아니었다. 노동력, 교육열, 가족의 희생, 청년의 시간까지 모든 것이 성장의 연료가 되었다. 국가는 산업을 키우기 위해 에너지를 동원했고, 기업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노동의 에너지를 동원했으며, 개인은 살아남기 위해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동원했다. 그 결과 우리는 경제성장과 기술 발전이라는 성취를 얻었지만, 동시에 기후위기, 저출생, 고령화, 청년 번아웃, 지역 소멸이라는 비용도 함께 떠안게 되었다.
우리는 언제까지 에너지를 ‘더 많이 쓰는 힘’으로만 이해할 것인가. 에너지는 반드시 생산과 성장의 수단이어야 하는가. 에너지를 다르게 상상할 수는 없는가. 철학자 마이클 마더는 『Energy Dreams』에서 에너지를 단순한 힘이나 자원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energeia 개념을 다시 읽으면서, 에너지가 무언가를 더 많이 생산하기 위해 짜내는 힘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쉽게 말해 에너지는 석탄이나 석유처럼 꺼내 쓰는 자원만을 뜻하지 않는다. 사람이 서로를 돌보며 살아가는 힘, 청년이 자기 삶을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힘도 모두 에너지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에너지는 쓰고 버리는 자원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것들이 자기답게 살아가고 서로 연결되는 방식이다. 에너지를 다시 생각한다는 것은 더 많이 쓰고 더 빨리 소모하는 방식을 넘어서는 일이다. 에너지는 서로를 소진시키는 힘이 아니라, 서로를 살리며 함께 지속되도록 만드는 힘일 수 있다.
그동안 동북아시아의 에너지 체제는 대체로 ‘추출’과 ‘동원’의 논리에 기대어 있었다. 자연으로부터 자원을 추출하고, 지역으로부터 인구와 노동력을 끌어오며, 개인으로부터 시간과 감정을 짜내는 방식이었다. 이 체제에서 에너지는 언제나 바깥에서 끌어와 안으로 투입되는 것이었다. 석탄과 석유가 그랬고,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한 노동력이 그랬으며, 학생들의 잠과 청년들의 미래도 그렇게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런 에너지 체제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기후위기는 자연을 무한한 자원창고로 여긴 결과이고, 저출생은 삶의 에너지를 재생산할 수 없게 된 사회의 신호이며, 번아웃은 개인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성장의 연료로 제공할 수 없다는 몸의 항의이다. 이것은 동북아시아 발전모델 전체가 마주한 에너지의 위기이다.
이제는 인간의 에너지를 노동력이나 인적 자원으로만 보지 않아야 한다. 동북아시아 사회는 오랫동안 사람을 ‘자원’으로 불러왔다. 인재, 인력, 인적 자원이라는 말은 익숙하지만, 그 말 속에서 사람은 쉽게 동원 가능한 에너지로 환원된다. 그러나 인간은 자원이 아니라 삶, 경제적 효율로만 계산될 수 없는 에너지이다. 이것들을 소모품처럼 다루는 사회는 결국 자기 기반을 스스로 약화시킨다.
동북아시아의 미래는 더 많은 에너지를 확보하는 데만 달려 있지 않다. 오히려 어떤 에너지를 꿈꾸는가에 달려 있다. 석탄과 석유를 재생에너지로 바꾸는 기술적 전환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에너지를 대하는 문명적 태도, 곧 자연과 인간을 동원하고 소모시키는 방식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이 ‘시너지’이다. 시너지는 단순히 힘을 합쳐 더 큰 성과를 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서로 다른 존재들이 서로를 소모시키지 않으면서 함께 작동하는 방식이다. 인간과 인간, 도시와 지역, 국가와 국가, 인간과 자연이 서로의 에너지를 빼앗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살리는 관계로 전환되는 것이다. 소진의 문명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빨리 성장하고, 더 강하게 경쟁하는 방식은 이미 한계에 이르렀다. 이제 동북아시아가 꿈꾸어야 할 에너지는 추출의 에너지가 아니라 시너지이다. 누군가를 태워서 앞으로 나아가는 에너지가 아니라, 서로를 살리며 함께 움직이는 에너지이다.
에너지를 다시 생각한다는 것은 동북아시아의 미래를 다시 묻는 일이다. 우리는 어떤 성장 이후의 삶을 상상할 것인가. 어떤 관계 속에서 살아남을 것인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함께 살아날 것인가.
에너지가 소모되는 자원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다시 살아가는 힘이라는 사실, 동북아시아가 이 사실을 배울 수 있다면, 이 지역은 더 이상 성장의 피로를 반복하는 공간이 아니라 공생의 문명을 실험하는 장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글/편집/번역 조대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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